아버지와 사랑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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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상진 작성일17-12-09 17:43 조회2,78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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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사랑니
“이리 들어오세요. 이쪽 의자에 앉으시고요. 오늘 무슨 일로 오셨어요?” “원장님
께서‘오른쪽 아래 사랑니를 빼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그걸 빼려고 왔습니다.” “그러셨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원장님께서 금방
오실 겁니다.” 하고 잠시 기다리자“안녕하세요?
오늘 드디어 사랑니를 빼려고 오셨어요?” “진작부터 빼는 게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
걸 빼려고 마음먹는다는 게 쉽지가 않네요.”
“잘 하셨습니다. 위아래 사랑니가 똑 같이 있으면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그냥 놔두
겠는데, 아래쪽만 있으니 아무 역할도 못할 뿐 더러
음식을 드실 때 위쪽에 있는 임플란트와 부딪칠 수가 있고 또 옆 이빨 사이로 음식물
찌꺼기가 들어가도 칫솔질로 완전히 닦아내지 못하면
이가 썩을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아~ 해보세요. 아랫니에 마취를 시키는데 따끔
할 겁니다.”하고 무언가 잇몸을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이내 아래턱이 묵지근한 느낌이 들면서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아~ 해보세요. 아~아!”그리고 잠시 후
“발치(拔齒)는 끝났습니다. 앞으로 약 2~3시간쯤 후 물고 계신 솜은 빼내시고. 침
은 삼키셔도 상관없습니다. 오늘은 식사하시면서
혹시라도 밥알이 이를 빼낸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약(藥)은 가글
할 수 액(液)과 진통제(鎭痛劑) 두 가지를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요즘 이빨 빼는 기술이 많이 발전했구나!
마취를 얼마나 잘했으면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빼 내다니!’느끼는 순간 갑자기 나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우리 모두가 힘들게 살았던 1960년대, 그때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었을 것 같다.
그때 보성읍에는 의원(醫院)은 몇 군데 있었던 것 같았는데 치과(齒科)는 한군데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턴가 아버지께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수건에 찬물을 묻혀 턱 주위를 감싸고 계셨는데 오른쪽 턱
주위가 빨갛고 퉁퉁 부어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으째 병원에는 가 봤소?” “빙원에 가문 머하꺼인가? 의사도
으디 가 불고 읍는디 거그 가문 이빨을 빼 준단가?”
“그라문 으짜 껏이라요?” “그랑께 말이여! 그나저나 아이고~오! 이노무 이빨이 왠
간이 애래야 살제!” “그나저나 그것 땀새 멋을
암껏도 못 자시문 우추고 사껏이라요? 그라지 말고 멋을 잔 자셔보제 그라요?” 어머
니의 말씀에 “아니 내가 멋을 묵기실어서 안 묵고 있단가?
이것이 이라고 애래싼디 우추고 묵으꺼인가?”하고 짜증을 내신다. 그리고 “이것 이
래갖고는 안 되것네! 딴 빙원이라도 가 봐야제!”하고
밖으로 나가신 아버지는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거의
울 듯 한 표정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날 밤 ‘끙! 끙’ 앓으면서 지금은 쓰지 않는 요강(尿강)에 침을 뱉고 계셨
는데 아침에 보니 그 안에는 피가 섞인 침이 가득 고여 있었다.
요즘처럼 진통제도 제대로 없었던 그 시절, 아버지는 이(齒)를 빼러 치과에 가셨으나
의사선생님이 안 계시자 일반 의원으로 가셨단다.
그리고 이를 빼내기는 하셨지만 고통은 정말 엄청나서 병원에서 “악~~~”비명을 질
러댔으며 며칠 동안을 턱을 싸매고“끙! 끙! 앓으셨던 것 같았다.
요즘은 의학의 발달로 이(齒)는 쉽게 빼 낼 수 있지만 그 시절 이를 한 번 빼 낸다는
것은 정말 큰맘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지,
그리고 아버지께서 요즘처럼 현대화된 시설에서 이를 빼 내셨다면 그때처럼 그렇게
고통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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