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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배기에서 장승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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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대홍 작성일17-10-09 12:18 조회1,9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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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배기에서 장승을 몰라?
백당 전대홍

장승배기역 사거리는 좀 독특하게 구부러진 사거리다. 
사거리 한 쪽에 서서 사방을 둘러봐도 똑바로 보이는 방향이 없다.
열 십자 사거리가 아니고,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이 서로 스쳐 가는 지점이 맞다.
그만큼 오래전에는 오지고, 후진 곳이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국토 남서편 지방 사람들이 한양성중에 가려면, 노량진 날룻배를 타야 했는데, 노량진 나루를 가려면 필수적으로 이길을 지나야 했기에, 적당한 쉼터와 안전 표시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조가 명을 내려, 길 안내 겸 백성의 안전과 한양성중 들어 오는 잡귀를 막기 위해, 장승을 세웠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역사책에서, 인터넷에서, 여러 자료 종합하여 내가 내린 결론이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두 장승은, 시골 마을, 또는 큰 도읍, 어디에서도 흔히 보는 모습에 규모다.
그런데 난 이 장승배기를 보려고 남다른 노력을 했다.
이름이 정답고, 근처이니, 도보답사 코스에 넣어 시도했기 때문이다.
장승이 박혀 있는 곳, 장승박이가 음운 변화를 거쳐 장승백이로, 이어 장승배기가 된 것 같다.
우리말뿐 아니라 영어에도, 아가 애로 혼용하는 예는 많다. 차돌박이가 차돌배기, 가랑이를 가랭이로 발음하는 예와 영어에서도 a 발음을 
ㅏ와 ㅐ 또는ㅓ로발음하지 않는가?
몇 주전 걷기코스 장승배기를 택하고, 초행이라 카카오 지도 치고 걸었는데, 중간에 전파장애로(군부대 주요시설 있어 인위적 장애 같음) 길을 잃고 헤매다, 고생만 하고 돌아갔었다.
오늘은, 추석 장기 연휴도 거의 끝나가고, 마침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기필코 장승배기를 답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실수를 줄이기 위해 최신 프로그램 T 맵을 켜고, 자동차 가는 길로 가기로 하였다.
그동안 유료라서 사용을 자제해 왔지만, 최근에 무료로 풀리어, 스마트폰에 깔아 사용하는 중이다. 실시간 지도에, 자세한 안내가 있어 사용하기 편리하다.
목표 지점 치니 4.7km, 1시간 7분 거리란다.
왕복하면 약 9km, 2시간 조금 더 소요될 것 같아 알맞은 거리다. 보무당당히 간단 복장 차려입고 길을 나섰다.
모처럼 신이나서 즐겁게 걷다보니, 한 시간 조금 지나, 드디어 장승배기역 도착이다.
T맵이 안내하는 대로, 좌우 회전하며 찾아가기는, 식은 죽 먹기다.
그런데 장승배기역에서 뜻밖의 일이 있었다.
지도에서, 인터넷에서, 분명히 장승을 발견했기에 눈에 선했는데, 막상 현지 와 보니 장승이 없다. 옆에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뜻밖에 모른단다.
사거리 코너에서 장사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장승을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 답도, "여기가 장승배기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저는 장승을 찾습니다." 하니, 모른단다.
이런 황당함이 있나?
그래서 '장승배기에서 장승을 몰라'란 제목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건널목을 건너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상점 주인을 찾아 들어 장승을 물으니, 쉽게 알려 준다.
"5번 출구 건너가 6번 출구 옆에서 찾으세요!"한다.
이제는 된 것이다.
한참을 걸어 둘러보고 6번 출구를 찾아 내려 가니, 거기에 장승이 있다.
결국, 찾은 것이다.
이리저리 사진 찍고, 셀프촬영하고, 옆 쉼터에 앉아서, 준비한 간식 먹으며 쉬다가 귀가를 시작했다.
좀 정신 차려 둘러보니, 이미 10년 전 다녀간 곳이다.
외손녀가 바로 옆 병원에서 출산, 그리고 길 건너편 조리원을  이용했기에, 이미 다녀간 곳이다.
지명은 기억에 없고, 장승을 보고 그냥  동네 장승으로 여기고, 사진까지 찍었었는데, 그곳이 역사의 현장 장승배기였을 줄이야?
놀라움과 허탈, 그리고 소박한 규모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다.
장승배기란 이름을 처음 듣고는, 잘 가꾸어진 유적지나, 공원  쯤 생각했기에, 허탈이 더 컸다.
그래도 어떻든 장승배기를 답사했다.
이제 귀가 차례, T맵으로 치니, 노량진역을 통해서 지하철 타면 쉽다는 결론을 얻었다.
노량진역까지 거리는 700여 m다. 그래서 결국 노량진역을 향했고, 역 근처에 왔을 때는, 체력도 남고, 이미 지나간 곳이기에, 지하철 타는 것을 포기하고, 더 걷기를 택했다. 혹 힘들면,  대방역에서 지하철을 탈 수도 있기에 서쪽을 향했다.
그러나 대방역에 와서도, 시간도 많이 남아 있고, 체력도 남아 있어서, 내친김에 집까지 걷기로 했다.
결국, 총 거리 9km, 2시간 반 소요, 멋진 장승배기 답사가 끝이 났다.
이렇게 해서 걷기 답사 코스 하나 추가요! 끝.

20171007 영등포에서
백당 전대홍

(장승배기 유래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자세하고 잘 된 것 선별해서 올리리 관심자 한 일독 권함)


☆장승배기’의 유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노량진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장승이 서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현재 지하철 7호선 6번 출구 앞에 표석을 세우고 다시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된 내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옛날에 이 일대는 인가가 없고 울창한 나무숲이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잊지 못해 화산(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으로 전환 배치하러 가다가 이 지점에서 쉬면서, “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우되,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자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자 장승을 세워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으로 하여라!” 하고 명하였다.

어명으로 장승배기에는 곧 두 개의 장승이 세워졌다. 
이는 왕이 안심하고 행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란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에 이 장승 앞에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고 한다.


☆ 더 자세한 유례도 있으니 흥미 있는 분 계속 보시라!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2동 영도시장 맞은편 삼거리의 노량진파출소와 우리은행 상도지점 앞을 장승배기라고 부른다. 
행정구역상 현재 장승이 서 있는 위치는 노량진2동에 속한다.
이곳은 노량진동과 상도동, 대방동이 접한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는 노량진 선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서울 시민 중에는, 상도동의 위치는 잘 몰라도 장승배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명칭이 널리 알려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 유명한 대방 장승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민속신앙 중의 하나이지만, 예전에는 동네 어귀나 사찰 입구에서 어김없이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 장승이다. 
장승은 경계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이(里)수를 적어 10리나 15리마다 세워둠으로써 이정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악귀를 막는 수호신이기도 했다. 
흔히 장승이 서 있는 곳을 장승배기라 하는데 우리나라 각지에 이런 이름이 남아있다. 
장승배기에서는 마을의 공동문제나 기타여라 가지 일을 의논했다. 
그러던 것이 마을 이름으로 되어 전해온 것으로, 이곳에 장승을 세우게 된 내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중기 사도세자가 부왕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비통하게 죽은 뒤 그의 아들 정조가 1776년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한시도 잊지 못했다. 그래서 정조는 화산(지금의 수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 곧 현륭원에 참배 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찾아가 아버지 무덤 앞에 무릎 꿇고 그 애통한 한을 달래며 명복을 빌었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과 주택들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 장승배기 일대는 낮에도 맹수가 나타날 것만 같은 울창한 나무숲이었다.

현륭원으로 가는 정조의 어가는 이곳에서 한번쯤 쉬어가야 했으나 아름드리 나무숲이 우거진 이 지점에서 쉬기란 적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비라도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인가가 없고 통행인마저 시오리 가야 한두 사람 만날까 말까 할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이에 정조는“이곳에 장승을 만들어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상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을 한 지하여장군으로 하여라.”하고 명하였다. 어명으로 장승배기에는 곧 두 개의 높다란 장승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는 왕이 안심하고 행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이곳은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고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 오는 길에 이 장승 앞에서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는 것이다.

한편 장승을 소재로 한 판소리와 서도창에 보면 이곳 장승의 이름이 팔도장승의 최고 우두머리인 대방장승이었고 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타나 있다. ‘가루지기전’은 변강쇠가 엄동설한에 땔 것이 없어 나무를 하러 첩첩산중에 갔는데, 눈 속에 땔나무할 것이 없어 길가에 세워 놓은 장승을 패가지고 오는 것을 풍자적으로 엮은 것으로, 변강쇠한테 도끼로 찍혀 부서진 장승이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멋스럽다.

이제 장승의 신앙적 의미는 미약해졌으나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풍물로 부활되어 명맥을 잇고 있다. (동작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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