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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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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광일 작성일20-02-18 14:30 조회1,7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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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82년 6월 1일자로 사무관으로 임관되어 발령받은 초임지가 천안우체국 이었다.

그런데 당시 새로 부임하신 이재설 장관님이 부임하신 이후부터 계속 체신금융사업의 부활의 당위성을 강조하시고 그 실행을 지시한 시기였다. 그래서 천안우체국에 발령받은지 25일만에 체신금융사업 개발팀에 차출되어 본부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 글은 그 이후 사업시행 준비과정과 시행을 거쳐 사업을 성장시키면서 겪어야 했던 성장통이랄까 어려웠던 사례 몇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와같이 개발팀에 합류 하면서 1983년 7월 1일을 시행일로 정하고 체신예금 보험에관한 법률 등 관계 법령 제정, 상품 개발, 종사원 교육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체신부에서 금융사업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그 해 정기국회 교체분과위원회에서 의원들의 질의가 봇물처럼 쏟어졌다. 사전에 예상질의답변서를 준비 했지만 의원들의 파상공세는 계속 이어져 그 순간 당황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런데 정기국회가 끝날무렵 고열과 두통에 시달려 곧바로 강남성모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병명은 과로 누적에서 오는 ‘편도주위 농양’ 이라는 것이다. 너무 급해 환자복으로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바로 수술대에 올랐다. 마취도 하지 않은채 입천장 아래쪽을 절개하고 농을 제거하는 수술이었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농이 혈관을 타고 뇌에 침입하면 온몸이 마비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아찔한 순간 이었다.

 

1983년 7월 1일은 체신부에서 역사적으로 금융사업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각종 매스컴에서는 그 상황을 앞 다투어 보도하였다. 그 덕분에 나도 금융사업 창설 실무 책임자로서 별로 잘나지도 못한 얼굴이지만 여러번 TV 전파를 탔다. 지방 각지로 부터 위로와 격려 전화가 빗발쳤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체국 예금 보험자금 조성액이 120조 원을 이룩한 기틀을 마련한 셈이니 실로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체신금융사업 중에서도 체신보험 사업은 전 종사원들의 관심과 참여속에 일취 월장하여 체신부의 주력사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것은 보험 모집과 보험료 수금에 따른 보상금이 수반되는 매력 때문이다. 또한 모집과 수금 보상금액의 일정비율의 취급보상금을 우체국 경비로 지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사업활동에 활력소가 되고 활기찬 직장분위기 조성에도 일조했다고 본다.

 

그 후 직원들의 능력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드디어 전문 모집인 제도를 도입 하게된다. 사업은 더욱 활성화 되어 정착 단계에 들어서면서 우수모집자들을 격려하고 계속 전진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1년에 봄, 가을 두번식 체신청에 예산을 시달하고 체신청 주관으로 관광버스 두대에 편승하여 관내 명승지를 관광 하면서 ‘보험모집인 전진대회’를 개최하고 격려 하였다. 이 때에 항상 강조한것은 “여러분이 우리사업의 주인입니다”라고 하면서 주인의식을 고취시켰다.

이 모집인 전진대회가 발전하여 체신공무원 최초로 단체로 비행기 타고가는 제주청 주관 행사로 이어졌으며 나중에는 공무원 단체여행으로는 처음으로 동남아, 유럽 여행으로 확대되기도 하여 체신보험의 위상을 높이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 라고 하듯이 체신보험사업의 발전을 시기하는 속 좁은 민간 보험회사들의 로비에 의하여 드디어 재무부에서 규제와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이유는 “왜 국가기관에서 민간기업 영역을 침범하느나” 그리고 “왜 사업을 계속 확장 시키느냐” 이다. 그 일환으로 보험 상품 개발, 보험금 한도액 인상 등 제도개선시 재무부 동의를 얻게 되어 있는데 그때마다 브레이크를 걸어 이를 설득, 극복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

 

가장 힘들었던것은 1990년 감사원 정기감사때의 일이다. 감사원에서는 사전에 철저히 조사. 준비한듯 처음부터 보험모집 보상금에 대한 소득세 탈루에에 대해 집중적으로 감사했다. 나는 과장님을 모시고 거의 매일같이 감사장(광화문 우체국 회의실)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대부분의 보험모집자는 우편물 배달을 겸직하는 영세한 집배원 들이며, 민간 부문에서도 이 모집수당은 자유직업의 소득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모처럼 시행한 국가서업인 만큼 여기에 소득세를 부과하면 사업이 위축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선처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 하였다. 그러나 담당 감사관(부감사관, 사무관)은 요지부동, 그동안 탈루한 소득세를 3년간 소급해서 17억 원을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17억 원! 당시 화폐가치로 엄청난 금액이다. 만약 이를 우리 종사원들에게서 추징하면 그 타격은 말할 수 없고, 사업이 급격히 위축될것은 불을보듯 뻔한일이다. 나는 과장님을 모시고 감사관 자택(개포동)을 수차 방문하기도 하고 인근 다방으로 불러내어 갖은 방법으로 회유하고 설득하려 하였으나 헛수고임을 알게 되었다. 뒤에 알고보니 그는 처음부터 승진인사 고과점을 받기위해 접근한 것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드디어 감사원 질의서가 돌아왔다. 예견된대로 3년간 소급하여 탈루액 17억 원을 추징하고 차후 보상금을 근로소득에 합산하여 원천세를 부과하라는 것이다.

나는 상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결방법을 고심하게 되었다. 할수없이 지인을 통하여 직접 감사원 담당과장(당시 1국 5과장)을 만나기로 하고 실천에 옮겼다. 사무실을 찾아가 몇 번 만나 사정을 설명 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다음에는 댁으로(방배동) 찾아가 같은 내용을 되풀이 설명하면서 읍소작전을 펼첬다. 드디어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크게 울부짖었다. 기쁨의 눈물도 함께‧‧‧‧. 이제 됐구나, 이것이 소명의식인가, 때로는 사명감에 젖어 스스로 감격할때도 있다.

그 후 감사원 답면서에 위와같은 이유를 들어 선처해줄것을 요청하면서 차후 보상금을 근로소득에 가산하여 과세할것을 약속 하였고 이내 감사원으로 부터 우리안대로 처리하라는 결정서를 받고 이 사건을 종료 하였다.

 

그래도 나는 보상금 소득의 성격을 밝히기 위하여 재무부 세제실 담당 과장에게 위에서 말한봐와 같이 대부분 영세 집배원의 겸직에 의한 소득인 만큼 자유직업소득으로 인정하여 세율을 낮추어야 한다는 요지의 문서와 함께 브리핑 차드를 만들어 설명하고 세제실 심의 안건으로 상정하도록 요청하고 승락을 받았다.

그러나 예측한대로 몇일후에 재무부로부터 안건에서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소득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소득의 종류가 구분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로소득자가 받는 각종 소득은 근로소득으로 합산되어 원천 소득세를 징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관계법령 시행령을 개정하여 감사원의 동의를 구한후 이후의 보상금은 급여에 합산하여 과세하도록 예하관서에 시달하고 종결하였다. 뒤에 안일이지만 담당 감사관은 감사원을 사직하고 공공기업체로 자리를 옮겼다고 하면서 도대체 ‘이광일’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더라는 말을 전해듣고 한동안 착잡한 심정에 젖기도 했다.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사업가 정신이 필요하고, 사업을 확장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진취적인 발상이 필요하며, 내 사업같이 아끼고 가꾸는 봉사정신과 사랑이 필요하다.

현재 내가 살고있는 우리면에 별정우체국이 있다. 금융거래상 자연히 우체국을 찾게되면 우체국장은 나에게 현재의 실상을 전하면서 하소연한다. 언제부터인가 복수노조가 설립되어 서로가 경계하는 분위기, 관내국장 회의시 차 한잔만 비우고 헤어지는 살벌함, 주 52시간 실시로 집배업무 정체와 소득 감소로 인한 소외감 등.

예로부터 우체국은 지역사회 봉사기관으로 주민들과 애환을 함께해온 다정한 이웃 쉼터였는데, 보험 취급보상금 등 재원이 있어 소통과 고객접대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과연 누가 이렇게 살벌하고 소외된 일터로 전락시켰는가. 책임직은 과연 사업을 발전시키고 종사원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가 묻고싶다.

 

이 광 일(서울지방정우회)

충남 천안 출생

전주이씨 덕양군파종중 종보 편집실장

전) 남울산, 인천, 서울동작우체국장

저서: 「산마루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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