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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울경 뉴스 디카수필>시(詩) 맛 당기던 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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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한 작성일18-07-13 17:19 조회1,9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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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울경 뉴스 디카수필>김성한, 시(詩) 맛 당기던 그날 밤

 

 

                              시(詩) 맛 당기던 그날 밤

                                                                                                                     김 성 한
 

  
 

     봄 햇살이 시나브로 두터워지고 있습니다. 

    지난겨울 비바체*로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에 콜록거리던 슬레이트집이 기침을 멈췄

습니다. 길섶에는 산수유가 실눈을 갠소름하게 뜨고 오가는 이에게 눈웃음을 칩니다. 낡

 

은 기와집 뒤란에는 목련이 입을 헤벌쭉 벌렸고 개나리도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조붓한 고샅길에는 할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지나갑니다. 삭정이 한아름이 할아버지

 

지게 위에서 호사를 누립니다. 삭정이 같은 할아버지 얼굴에도, 허리에도 봄은 내려

 

않았습니다. 완연한 봄날입니다.


 

    여러 해 전, 온 세상이 꽃불을 켜던 4월 어느 날 밤이 생각납니다. 그날은 내가 근무하

 

는 영주우체국에서 시(詩) 낭송회를 열었던 날입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詩 낭송회>라

 

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무대 위에는 개나리, 복사꽃, 진달래가 열(列) 지어 서 있습니

 

다. 화장을 한 채 서 있는 꽃들을 보니 어릴 적 고향 마을 뒷집에 살던 ‘꽃님이’ 누이가 떠

 

오릅니다. 봄이면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지 들녘을 쏘다니다가 꽃만 보면 볼우물을 파며

 

배시시 웃어대던 누이였습니다. 천장을 타고 내려오는 불빛 한 줄기가 봄꽃 얼굴을 어루

 

만지자 꽃님이 볼처럼 금세 불그스름해집니다.


 

   우체국 창문 너머로 어둠살이 끼기 시작합니다. 한 번쯤은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

 

이 삼삼오오 체국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시심(詩心) 가득한 얼굴에는 시(詩) 꽃이 활

짝 피어 있습니다. 

 

     드디어 사회자의 오프닝 멘트곡인 ‘대니 보이(Danny Boy)'가 감미로운 트럼펫 선율

 

을 타고 4월밤하늘로 날아 올라갑니다. 객석 어디에선가 와와! 하는 함성도 들립니다.

꽁지머리에 한복을  입은 늙은 시인이 무대 위로 올라서자 장내는 정적에 휩싸인 듯 고

요합니다. 옆자리 대머리 시인은 침까지 꼴깍 삼킵니다. 시 구절 끄트머리를 살짝살짝 올

리면서 읊는 서울 신사의 낭랑한 목소리 또시 맛을 새롭게 합니다.

 

 

   이윽고 내 차례입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일곱 색깔 무지개 풍선으로 치장한 마

 

이크 앞에 섰습니다.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립니다. 이런 자리는 난생처음입니다.

 

                

                    우체국 사람들 / 안도현

 

     ​ 햇볕 좋은 날 /우체국 사람들은 햇볕을 모아서 /세상이 어두울 때 

 

      나누어 줍니다 (중략)// 우체국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따뜻해지고 

      촉촉해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으로 모였다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이유는 /우체국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중간 울렁증이 있었지만 박수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무대를 내려오자

 

꽃다발 하나가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시에 빠지고 선율에 취하던 그날 밤, 시(詩) 맛이

 

당기던 4월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었습니다.

 

 

   그 몇 년 후에 나는 퇴직을 했습니다. 참으로 묘합니다. 그때 그 사건(?)이 은퇴 후 밴

 

댕이 소갈머리 같은 내 마음을 누그러뜨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잘 삐친

 

다는 삐침병 치료에는  한 줄의 시 낭송이, 한 소절의 가곡이, 한 장의 원고지가 참으로

 

효과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나아가 노년이 되어도 가시지 않는 욕심병에도, 미

 

움병에도, 심지어 가슴앓이 병에도 특효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의 행간을 목소리로 눈으로 밟을수록 마음의 행간도 따라 흐르는 시 낭송, 어쩜 인

 

생 낭송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바체(VIVACE) ; 악곡을 연주할 때 ‘아주 빠르게 연주하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빠

르기말임.


 

 

  

▲ 수필가 김성한(金成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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