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주는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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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상진 작성일20-12-12 15:51 조회3,24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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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주는 연습?
시내에서 볼 일을 마치고 천천히 마을회관 앞을 지나가는데“이루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가~아!”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코로나19 때문에 지금까지 굳게 문이 닫혀있던 마을 노인정이 어느새 할머니들
이 모여 깨끗이 청소를 끝내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 “저는 여자들이 많은 곳에 가면 부끄러워 말을 잘 못하는
데 어떻게 할까요?” “머시 으찬다고?
여자들이 만하문 여루와서 말을 못한다고? 별 소리를 다 해쌓네! 그른 소리 말
고 얼렁 이루와서 커피나 한 잔하랑께!”
“그러면 많이 부끄럽지만 염치를 무릅쓰고 용기를 내겠습니다.”하고 노인정에
들어가 막 자리를 잡고 앉는 순간
“거기는 아가씨들만 들어가는 곳인데 웬 외간남자가 그라고 있는고? 얼렁 안 나
오꺼시여?”하는 소리에 밖을 내다보니
마을 형님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남자는 절대 출입금지 구역인데
오늘은 특별히 괜찮다고 하네요.
그러니 형님도 이리오세요!” 하자 “참말로 얼렁 이리오세! 그노무 코로난가 머
신가 땀새 요새 통 사람들 꼴도 못 봤는디
오랜만에 노인당 문을 연께 참말로 조쿠마!”하는 마을 아짐의 말씀에 “그라문
못 이기는 척하고 커피 한 잔 마시까?”하는 순간
“애기 아빠! 나 우리 친정에서 왔다가라 해서 잠시 다녀 올 테니 그렇게 아세
요.” “응! 내 꺽정은 조금도 말고 내일 와도 되고,
모레와도 되니까 편하게 갔다 와!”하며 방금 전 선배 부부가 이야기를 나눈 후
형수님이 운전하는 차(車)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
“형수님께 내일 오셔도 되고 모레 오셔도 된다고 하시던데 정말 그래도 괜찮은
가요?” “괜찮으니까 그렇지 안 그러면
그렇게 말을 하겠는가?” “그러면 식사는 어떻게 하시고요?” “밥이야 내가 차려
먹으면 되는 것이고 잠은 어차피
요즘 각방 쓰고 있으니 집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잠자는 데는 지장이 없어!” “그
러면 빨래는 어떻게 하시고요?”
“빨래는 세탁기가 알아서 해 주는데 무슨 걱정이 있는가?” “그러면 별거하시는
건가요?” “에이~ 별거는 따로 사는 것을 말하는데
나는 지금 같은 집에서 함께 사는데 무슨 별거겠는가? 굳이 말하라면‘놓아주는
연습’이라고 해야 할까?” “놓아주는 연습이라고요?”
“왜 이상한가?”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런 연습을 하려고 생각하셨어요?” “그
러니까 내가 직장에서 정년하기 6개월 전 쯤
우리 집사람이 심각한 얼굴로‘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부르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무슨 이야기든 해 보라고 했지.”
“그러면 어떤 이야기를 하시던가요?” “그때 이런 말을 하더라고‘지금까지 당신
과 결혼해서 수십 년 동안 함께 살면서
매일 아침과 저녁 밥 차려주었지, 빨래해주었지, 기타 여러 가지를 모두 당신 위
주로 생활하다보니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 이래서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없다. 그래서 앞으로 나도 나를
위해서 살고 싶으니 퇴직을 하면 반찬은
내가 만들어 줄 테니 식사만이라도 당신이 차려 드시고 설거지만이라도 해주면
고맙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퇴직 막하고부터
지금까지 밥 차려 먹는 것은 물론이고 집안 청소, 세탁까지 웬만한 것은 집사람
이 신경 쓰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거든.”
“그러면 형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퇴직하기 전부터 그렇게 약속했고
지금은 지키고 있는 것뿐인데
특별히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면 그런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하세
요?” “지금 내 나이가 낼 모레면 80인데 지금부터라도
서로 자유롭게 놓아주는 연습을 해야 나중에 혹시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도 도
움이 되지 않겠는가?”
누구네 집 울타리에는 아직도 하늘 수박이 달려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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