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의 일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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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류상진 작성일25-01-25 14:47 조회1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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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의 일 년
어젯밤 휘파람을 불며 찾아온 강한 찬바람은 길가에 외로이 서있는 가로수를 함부로 간지럽히고, 만지고, 마구 흔들면서
온 세상을 낙엽 천지로 만들고 싶은 것처럼 날뛰는데 미처 이별 연습도 못한 나뭇잎들은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우수수 떨어져 흐르고,
구르고, 날리자 바람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호탕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관주산 정상에서 운동을 마친 후 일행들과 함께 천천히
산을 내려와 농로 길을 걷는데 지난가을 황금물결을 자랑하던 들녘의 벼들은 부지런한 농부들이 모두 수확을 마치자 이내
검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비둘기 두 마리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선배께서 “요즘 들녘을 보면 자네는 무슨 생각이 들던가?” 물었다. “글쎄요!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들녘을 보면 조금 황량하다고 할까요? 아니면 쓸쓸한 느낌? 뭐 그런 것이겠지요.” “그런가?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집 뒷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건너편에 논들이 보이거든.” “형님 집은 우리 마을에서
제일 높은 집이니 자연히 그렇겠지요.” “그런데 요즘 풍경하고 봄에 보는 풍경하고 전혀 다르거든.” “아무래도 만물이
생장하는 봄하고 수확이 모두 끝나버린 지금 들녘의 풍경이 비교가 되겠어요? 그러면 형님은 어떤 계절이 가장 좋던가요?”
“봄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올라오면서 조용하고 쓸쓸하던 들녘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아 좋거든, 특히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어 놓으면
‘저것들이 언제 자라 나락이 될까?’하는 마음이 들면서 마치 옛날에 우리 애기들 유치원에 보내놓고 ‘저것들이 은제 커서
사람이 되까?’ 하는 마음이 들면 흐뭇하면서도 무언가 잘못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느낌! 자네는 혹시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던가?”
“왜 그런 느낌이 없겠어요? 저도 애기들 초등학교에 보내 놓고 ‘혹시 애들이 교통사고라도 당하지 않을까? 혹시
나쁜 유괴범이 데려가지 않을까? 혹시 불량식품 먹고 배탈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다 잘 자라주니 제가 괜한 걱정을 했더라고요.” “그렇지! 그러면서 금방 바람에 날려버릴 것 같은 어린 모들이 점점 자라나
여름이 되면 들녘에 짙푸른 녹음이 가득한 채 사람으로 치면 한참 젊을 때이니 얼마나 보기가 좋겠는가? 그런데 그때가 되면
내가 젊었을 때 벼에 무슨 병충해가 그렇게 많았는지 도열, 문고, 이화명충, 벼멸구, 흰빛 잎마름병 등 갖가지 병도 많아
여름이 되면 논에 농약(農藥)을 치느라 들녘에 온통 독한 약 냄새가 가득했는데 요즘은 병도 별로 없어 일 년에 한 번 치든지
아니면 치지 않고 끝난다는데 냄새도 나지 않으니 약을 쳤는지 안쳤는지도 몰라.” “갈수록 기술이 발달하면서
병충해에 강한 벼 품종이 나오니 농약을 칠 필요도 없어져서 그러겠지요.” “그리고 가을이 찾아오면 어느날부터 천천히
벼 이삭들이 조금씩 누런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기분이 흐뭇해지며 들녘을 바라보면 볼수록 마음이 설레면서
풍족해지는 느낌이랄까? 뭐 그런 기분 있지 않은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더라고.”
“그러다 완전히 황금물결을 이루면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겠네요.”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리고 어느날 돌아보면
어느새 벼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디선가 나타난 비둘기 몇 마리가 들녘을 지키고 있으면 아! 드디어 겨울이 찾아오겠구나!
생각하며 이렇게 일 년을 보내버린 서러움 같은 것과 또다시 찾아올 내년 봄을 기다리는 그런 마음이 늘 함께하고 있더라고.”
"자! 길냥이 님! 긴장하지 마시고 '김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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